[더 랍스터-요르고스 란티모스] 전체의 부분을 거부하는 인간적인 몸부림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당돌한 캐치프레이즈를 천연덕스럽게도 구현해 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설정에 속 시원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은 예전에 “88만원 세대” 라는 책이 처음 나와 청년 빈곤을 지적해주었을 때 느꼈던 위안과 유사한 것이었다. 세대 담론이 갖고 있는 맹점에도 불구하고, 청년세대를 새롭게 명명하면서 청년이 대면하고 있는 진영이 선명한 윤곽으로 드러났듯, 더 랍스터의 세계는 사랑만이 결국 지상 최대의 가치, 라고 퉁치며 넘어가고 훈계하는 우리 사회를 기묘하고 매력적으로 비틀었다.

 

아무리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가 왜 필요한가를 묻지 아니하고, 맹목적이고 시스템에 의해 강제될 때 가치의 상실이 동반된다. 사랑이 생존의 조건이 된 환경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위장하고, 살기 위해 다른 인간을 사냥한다. 그들은 경쟁에 실패해 다른 생물체로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사랑이란 먹잇감을 얻기 위한 몸부림들은 이미 야생의 동물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에 불과하게 되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랑 강제 시스템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데, 사랑을 억압하는 시스템에선 반대로 사랑을 한다. 역설적으로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인간이 가장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 이걸 통해 사랑이 위대하기보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적해낼 수 있다. 홀로 존재할 순 없고, 전체의 부분이면서도 전체에 자기 동일시해서 살아갈 수 없는 동물. 어떻게든 온전한 체계에서 뒤틀려 빠져나올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 이 본연의 결핍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영화는 이미 대답한 듯싶다. 해결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여기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몸부림은 슬프지만 또한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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